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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평케하는 지혜 (2009년 4월 2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보)

<화평케하는 지혜>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보, 2009.4.2. http://www.snup.or.kr/?article_srl=13537)
특 집 1 : 나는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는가?


“당신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삽니까?” 라고 질문을 받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답을 문자화해 기록으로 남긴다는 부담까지 더해지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글 청탁을 받고 고사했지만, 결국 난감함을 무릅쓰고 몇 자 적는다.

과연 이 시점에서 내가 믿는 가치는 무엇일까? 항상 더 충실히 지혜롭게 살지 못해 후회하지만, 그래도 매일의 삶을 떠받쳐 주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젊은 시절 긴 방황 끝에 갖게 된 종교, 개인적 차원에서 전공으로 선택한 국제정치학, 한국의 분단 현실… 이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그러한 가치 지향을 모색해 온 것 같다.

중학교 시절 ‘외교’라는 것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내가 살던 전주 교외의 시골 어른들 덕택이 아니었나 싶다. 동네 이발소가 항상 그렇듯이 그곳은 일종의 복덕방으로 노변정담이 오가는 곳이었다. 하루는 이발하면서 졸고 있었는데 언뜻 “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더 잘살 수 있을 텐데…”라는 이야기가 귀전에 들려왔다. 그때부터 ‘통일이 되어야 하나 보다,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외교가 중요한가 보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문리대 외교학과를 재수까지 해서 들어온 동기였다.

가난한 이상주의자 시골 청년이 경험한 1970년대는 문리대의 낭만과 암울한 정치・사회 현실이 함께 어우러져 끝없이 방황한 시절이었다. 나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기준, 열정…이 모든 것들은 당면한 독재정치에의 항거하기 위해 쓰여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유신시대 운동권 학생으로서의 대학 시절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4년 동안 4학기만 학교가 제대로 문을 열었고, 그나마 학생운동과 아르바이트로 공부를 제대로 못했기에 졸업장 받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대학원을 진학했고,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개인적 좌절과 정신적 방황은 군대 말년이던 1980년 봄 광주항쟁 사건 즈음해서 정점에 달했다.

그때 일어난 일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그 일들은 내가 믿어 왔던 모든 가치관과 기준을 허물어뜨렸다. 이성과 양심, 이웃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열정, 이 모든 것들이 철저히 조롱당해 버렸다. 삶이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던 그즈음, 아내를 만났다. 국비유학으로 출국을 앞둔 시점에서 그녀에게 구혼했다. 그녀는 교회에서 결혼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고,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몇 군데 대학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워싱턴 DC에 소재한 존스홉킨스 대학의 국제관계대학원(SAIS)을 택한 것 역시 그것이 외교중심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반도 평화와 분단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외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경험한 국제정치로의 지적탐구 여행은 고통스러웠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그 긴 1970년대의 방황은 끝나 있었고(경제적인 것만 빼고)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처음 맛보는 풍요기였다. 졸업 후 캘리포니아 대학에 조교수로 취직해 지낸 3년의 세월은 프로페셔널리즘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때의 흔적이 지금도 내 일상의 삶 속에서 남아 있는 것 같다.

1990년 서울대로 자리를 옮겨 시작된 나의 1990년대는 한국 현실에 천착한 시기였다. 국제정치경제라는 세계의 흐름과 국내정치경제라는 우리 내부 흐름 간의 간격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가 주요 문제의식이었는데,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1997년 환란이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국가경제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데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던 지식인들의 모습이었다. 범람하는 서양 학문의 이론이 걸러지지 않은 채 수입되어 유통되는 반면, 우리 문제에 대한 성찰과 고민의 부족이 우리 지식인 사회의 내공 부족으로 연결되어 급기야 나라가 절단 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에 대한 나 스스로의 반성이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과 참여를 하게 만들었다. 동료 학자들과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어 한국사회현실이 당면한 도전 극복에 대한 올바른 담론 형성을 시도했다. IMF 외환위기를 낳은 정치경제적 원인을 파헤치고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하고자 「21세기 한국정치경제모델」을 출간했다.

1960~1970년대의 고속성장을 가져온 발전국가모델은 정치・경제・사회 권력의 집중과 담합 구조를 낳아 합리적 시장원리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작동을 어렵게 만들고 외환위기를 낳았기에, 결국 권력분산과 견제장치가 제도화한 새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21세기형 정치・경제 모델을 국내적으로 자리 잡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는 안정적인 외교환경이 필요했다. 심지어 중국과 같은 대국도 국제경제의 성장을 위해 안정적인 외교환경을 만드는 것은 최고의 목표로 삼고, ‘화평굴기’를 외치며 미국과 우호하고 동아시아 국가에 미소 짓는 것 아닌가. 그것이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 외교부 장관으로 일할 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2003년의 상황은 어려웠다. 새로 시작하는 진보정권의 기대치는 높았고, 이념의 거센 파도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었다. 김정일은 제2의 북핵(北核)사태를 일으켰고, 미국 부시대통령은 강한 이데올로기적 선악관을 가지고 북한과의 협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도 소련과의 핵감축 협상에 기꺼이 나선 레이건 대통령의 실용정신을 이야기하며 대북협상을 설득하려 애썼다. 국내적으로는 부시 행정부의 강성정책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나친 이념성을 경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 내에서 실용적인 접근법을 취하려 한 파월 장관이 어려움에 처했던 것과 비슷하게, 나도 우리 행정부 내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2004년 1월에 사임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지나친 이념성을 경계한다. ‘민족이냐 동맹이냐’라는 허구적인 이분법도 경계한다. 북한식 민족 개념이 우리의 진정한 민족 개념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북한이 살려면 세계로 나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의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이념과 잘못된 이분법의 함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평케 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전문 지식도 중요하고, 열정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덕목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지혜다. 진정한 지혜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 같다. 그러한 지혜가 갖추어질 때 권력은 겸손한 자세로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주어진 특수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요즈음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지식뿐 아니라 지혜를 갖춘 지도자들이 될 수 있을지’가르쳐 주려고 애쓴다. 경청하면서 감사하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나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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