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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새천년을 준비하는 정치 (매경 1999/12/3)

 

새천년을 준비하는 정치


최근 정국을 보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왜군이 밀려들어오기 직전까지 정쟁을 일삼던 임진왜란 당시 우리 선조들이 생각난다.  또 외세가 밀려들어오는 상황에서 눈앞의 파당적 이익에 사로잡혀 정치적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나라를 망쳐버린 구한말 정객들도 떠오른다. 

 

폭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 정객이 흔들어대는 문건 한 장, 어느 사모님의 코트 한 벌에 온 나라 정치가 마비되고, 신문은 그 사건 보도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한 것이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2000년을 한 달 앞둔 지금 지난 한 세기를 되돌아볼 때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사의 주류가 아니라 뒤만 따라온 지각생이라는 점이다.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의 늪에서 허우적댔고 후반에는 냉전의 뒤안길에서 헤매고 있다.  세계는 이미 10년 전 냉전이 끝나고 새 질서가 들어섰는데 1000만 이산가족은 아직도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고 북한에서는 몇백 만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 우리밖에 없다.  만일 우리에게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냉전의 굴레를 떨쳐버리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냉전 붕괴 후 동북아 권력정치 판도가 복잡하게 바뀌고 있어 더욱 그렇다.  소련이 사라지자 미국의 동북아 개입 명분은 상대적인 것이 되었고 일본은 군사강국의 길로 들어섰다.  중국은 실질적인 대국 노릇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며 러시아도 국내정세가 호전되면 발언권을 높일 것이다.  이처럼 국제적 역학관계가 복잡해지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추스리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최소한 경제공동체 정도라도 만들어 놓아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를 남의 힘으로 벗어났기에 분단을 맞았던 것처럼, 남북문제를 냉전의 관성에 빠져 국제정세 돌아가는 대로 남들에게만 맡겨놓고 있다가 또 한번 당하고 말 것인가?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 상황에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고 박정희 모델이 개발됐다.  결국 박정희 모델은 냉전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형평이라는 가치, 그리고 노동자들을 억누를 수 있었던 초기산업사회 시대에 통용될 수 있었던 일시적인 모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모델을 영원한 성공의 비법인양 세계화한 탈냉전 지식정보화 시대에도 고집하다가 IMF사태를 맞았다.  물론 고속성장에 재벌의 공헌도 컸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이래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에 계속 끌려 다녔다.  막대한 정치자금이 오가고 엄청난 은행 빚과 경제력 집중으로 나라경제가 재벌의 포로가 되어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이나 국민이 시장과 게임의 규칙을 지키고, 기업구조를 혁신하라 한다고 해서 재벌들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 결과가 도덕적 해이요, 구조 조정 지연이요, 결국 IMF사태였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정치경제의 새 틀을 짜기 위해 정치인, 관료, 기업인, 노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도 부족할 판이다. 

 

효율적인 자원배분,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통합을 동시에 달성해내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선진국들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해낼 제도를 모색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시간이 촉박하다.  과제는 힘들고 할 일은 태산 같은데 국력이 결집이 안되고 있다.  언론 문건, 옷 로비 사건과 관련해 도덕성 문제가 걸려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소수 정권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살얼음을 딛는 마음으로 인사문제에 임했어야 했다.  그러나 야당도 잘못된 문제의 원인을 풀어나가는 쪽으로 힘을 모으지 않고 폭로에 폭로를 거듭해 정권을 흠집 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권을 위해 나라의 운명을 그르쳐도 된다는 발상과 다를 바 없다. 

 

다 알다시피 김대중 정권은 보수세력과의 연합해 근소한 표 차로 정권을 잡은 소수 연합정권이다.  몇십 년 야당을 하다보니 인재의 풀도 적고 현 정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과거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보다 더 고결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조금만 더 흔들어 대면 몇 달 못 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여야와 출신 지역을 불문하고 사안에 따라 힘을 모아줄 때는 모아 주어야 한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 나머지 임기 3년을 아무 것도 못하게 마비시켜놓고 3년을 허송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날처럼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는 나라 하나가 2류에서 3류, 4류로 전락하는데는 3년이 아니라 3개월이면 족할 것이다. 

 

새 천년을 앞둔 시점에서 후손들을 생각하고 세계사에서 후진성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대국적인 관점에서 힘을 모으는 생산적 정치를 펴나가야 할 때다.

 

(매일경제신문 1999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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