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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정상회담 발상전환 필요 (매경 2000/5/26)

1940년대 유명한 국제정치학자인 데이비드 미트라니(David Mitrany)교수는 국제정치에서 전쟁과 갈등은 국가내부의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 영향받은 시각을 기능주의라고 부른다. 한국은 과거 냉전시대의 첨예한 남북간 대립상황에서는 북한문제에 대해 기능주의적(functionalist)인 접근을 시도하지 못했고 대신 미국과 함께 전략적(strategic)인 접근을 취해왔다.

오는 6월12일부터 시작되는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는 아마도 이제부터 북한문제를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도 풀어나가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북한의 핵 문제, 미사일 문제와 같은 증상들에 대해서 일이 발생할 때만 군사전략적인 관점에서 대증적으로 대처해 왔다. 그러나 이제 정상회담이 성공한다면 그 동안의 전략적인 접근에 더하여,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 증상이 아닌 근본적인 원인, 즉 경제난에 대해 지속적인 치유를 시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상회담에 북한이 나오게 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냉전의 붕괴와 같은 국제환경의 변화이다.  둘째는 한국 정부가 꾸준히 추진해온 포용정책이 결실을 맺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당국은 공식적으로는 남한의 포용정책을 비판해왔지만 암묵적으로는 어느 정도 신뢰를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북한은 최소한 미국의 정권교체가 끝날 내년 초까지는 미국에서 크게 얻어낼 것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한국에 접근했을 수도 있다.

남북한 정상회담이 성공하면 그것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 수단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냐하는 염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북 경제협력이 심화되면 멀지않아 남북한의 투자능력은 한계에 도달하고 미국자본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북한간 경제협력 과정에서 북한은 시행착오를 통해 제도 법 그리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을 받아들일 준비가 더 잘 되어있을 수 있다. 그 경우 미국의 자본력이 북한에 대해 갖는 가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오히려 기능주의적 접근의 성공은 미국의 적극적 협력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가지 기억할 점은 우리는 아직도 북한이 단기적인 물질적 지원만을 염두에 두고 정상회담에 나올 것인지, 아니면 장기적인 경제발전계획 추진과정에서 한국과의 협력까지 생각하고 나올 것인지를 알 수 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최악의 경제적 고비는 넘겼고 그 동안 군부를 장악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 있게 국제사회에 나서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를 보면 앞으로도 서서히 변화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정일 총비서는 70년대 한국에서 실시되었던 권위주의적인 경제발전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러한 발전모델을 아주 조심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아예 개혁을 전혀 추구하지 않거나, 아니면 러시아와 같은 급진적인 정치경제 개혁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제 시작에 불과한 정상회담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마도 다음 세 가지 목표 중 하나만 달성해도 우리는 성공적인 회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남북정상간의 신뢰구축이 되지 않으면 어떤 현안도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양측 정상은 앞으로 정상회담을 정례화하겠다는 합의를 해야할 것이다. 둘째는 두 정상은 주로 경제적, 인도주의적 분야에 있어서 타협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즉, 남측은 전력공급, 인프라 건설 등 경제협력 제공을 약속하고 북측은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에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총비서에게 위에서 언급한 권위주의적 발전모델의 채택을 권유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이 파트너가 될 것임을 설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처럼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 정상회담의 성격을 규정해본다면 정상회담의 성공은 곧 한국, 미국, 일본간의 어느 정도의 분업 형성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 일본과 기존의 전략적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당분간 북한의 경제문제를 타결하는데 우선적으로 중점을 둬야 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북한 경제난 타결을 도우면서도 대량살상무기 문제와 다른 현안을 타결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측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미군철수 문제나 보안법 폐지 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북한측이 취하는 자세는 북한이 정상회담에 임하는 의도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미국측도 한국정부를 신뢰하면서 동시에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관련해서는 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한ㆍ미ㆍ일간의 협력도 과거보다 더욱 세련된 형태의 협력이 필요한 시점에 들어섰다.

(매일경제, 2000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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