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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21세기 한국정치경제론 박호성 교수 서평

21세기 한국정치경제모델

-좌(左), 우(右), 그리고 집중구조를 넘어서-

(윤영관, 신호서적 刊, 1999)


박호성 (서강대교수 : 정치학)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몇 가지 이유에서 지극히 도전적이고 야심적인 저작이다. 우선 첫째, 이 저술은 한국 정치경제의 새로운 틀을 모색하고자 하는 학자적 사명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지금 국가적 동란에 견주어지기도 하는 IMF 위기에 온 국민이 신음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무엇이 위기의 본질이며, 또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도전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고, 또 던져야만 하는 것이 학자의 의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학자적 사명감, 그리고 도전과 양심


둘째, 윤영관 교수(서울대)는 이 저작 속에서 기존 정치경제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도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간 우리 학계의 경향은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경제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분석해왔기 때문에 정치권력∙제도∙문화∙가치 등 경제 외적 요인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온 잘못을 저질렀다고 저자는 항변한다. 이런 형편에서 과연 정당한 문제 해결의 방안이 강구될 수 있었겠는가를 윤교수는 따지듯 묻고 있는 것이다.

 

셋째, 윤교수는 동시에 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돼왔다는 사실에 준엄한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론의 경제결정론적 성격이나 세계체제 수준에서의 설명은 이론적 체계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경제의 모순을 전적으로 외생적인 원인에서 찾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에는 한국 사회의 문제나 계층구조가 너무 다양화돼 버렸다”고 그는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윤교수는 “구(舊)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도 그 이론의 설명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못 박는다(p. 5).

 

이런 몇 가지 비판적 전제 하에서 윤교수는 자신의 야심적인 구상과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정치현상과 경제현상의 엄격한 분리를 전제로 하는 경제주의적인 접근방법의 한계와, 거시적이고 정치경제적이기는 하지만 설명력이 약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시도한다”(p. 5)는 점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요컨대 그는 파리채 하나로 두 마리의 파리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것이다. 가히 일망타진형 도전 자세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거시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 설명력을 갖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시도한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윤교수는 지금껏 흔히 무시해온 국제적 요인의 중요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겠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기존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전략이 초래한 내재적인 모순의 정체를 우선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극복 방안도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 역시 일망타진형이다. 어쨌든 윤 교수는 비판과 대안 제시를 병행하면서 구체성과 체계성의 구축이라는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학자적 양심’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일망타진 형’ 비판과 대안 제시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저서를 관통하고 있는 저자의 희망과 기본정신은 ‘유연성’과 ‘사회적 연대’의 확보에 있는 듯하다. 유연성은 사회적 효율을 제고할 수 있고, 사회적 연대는 사회적 형평과 통합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확립에도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가히 정치사상의 본질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 육박한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단순치만은 않다. 우리에게 던져진 당혹스러운 과제는 버트란트 럿셀이 고전적인 어투로 읇조렸듯이 “진보를 위해 필수적인 개인적 이니셔티브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사회적 결속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버트란드 럿셀, Authority and the Individual, 1949). 요컨대 ‘평등’과 ‘성취’ 또는 ‘경쟁’과 ‘복지’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립셋이 자성적으로 털어놓았듯이 “성취는 기회의 균등이 행하는 기능”이며 이에 대한 강조는 “새로운 신분의 불평등, 그리고 높은 지위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타락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미국의 딜렘마’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세이모어 마틴 립셋, The First New Nation : The United States in Historical and Comparative Perspective, 1967)

 

그러나 어찌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이겠는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 ‘성취’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고, 과거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은 주로 ‘평등’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바대로다. “정치적 자유가 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듯이, 빵이 정치적 자유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집중의 정치경제 구조’를 ‘분산의 정치경제 구조’로 전환할 것(p. 217)을 촉구한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적 정치경제의 특징을 한 마디로 ‘각 부문에서의 권력집중’(p. 160)이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제력의 집중을 의도적으로 심화시켜왔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집중과 집중된 권력 중심들간의 유착’이 국가의 자율성을 박탈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의 변화에 발맞춘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이 고질화됐다고 진단하는 것이다(p. 166).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재벌들의 비자금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받아온 정치권이 재벌문제를 개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정치권력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 직선이라는 절차적 민주화가 달성됐음에도 정치권력의 집중문제는 전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못한다고 저자는 개탄한다. 그러므로 정부 기관이나 중요한 사회 세력 집단들이 독립성과 고유권한을 부여받아도 최고 권력의 의지를 해바라기처럼 따르는 모순이 결코 극복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중된 권력들간의 유착관계를 해소함과 동시에 권력 내부의 집중구조를 해소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p. 168).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특히 IMF에서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교훈으로서, 전문화∙유연화되지 못한 ‘어설픈 한국식 거대주의’야말로 비효율과 비민주의 온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는 중산층의 활성화와 조직화의 필연성을 역설한다. 저자 관점에서는 우리 경제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인 공정경쟁 및 반독점의 이념과 유연성 제고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잠재적인 정치세력으로 바로 중산층을 꼽는다.

 

따라서 정당법, 선거법, 정치자금법 등을 대폭적으로 개정함으로써 중산층의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의 등장이 수월하도록 만들고, 이들을 정치세력으로 끌어안지 않으면 안된다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에게는 정치개혁이란 전면적 사회개혁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치중립’은 과연 중립적인가?


이처럼 윤교수는 때때로 모든 이론의 숙명이라고 할 수도 있는 유토피아적 성향까지 풍기면서 지극히 거시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새로운 정치질서의 탄생을 열렬히 고대해 마지  않는다. 이러한 저자의 성실한 학문적 자세와 건강한 대안 추구 노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흥미롭게 주목할만한 사실은 연구자의 입장에 관한 저자의 시각이다. 그는 연구자의 입장이 중립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눈치다. 따라서 그는 “특수집단이나 계급 이익에 사로잡히지 않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지식인들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p. 9). 그러나 이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아니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일일까?

 

나는 저자의 이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물론 “좌(左)냐, 우(右)냐? 친재벌이냐, 친노동이냐? 친정부냐 등의 레벨을 붙여 단칼에 규정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지적 풍토”는 저자와 함께 규탄해야 마땅한 현실이다. 그러나 현실을 거부한다고 해서 현실 자체까지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학문의 세계에서 흑백논리를 논박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 자체까지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한때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구가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야말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물론 원수를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원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역사적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가치중립’이라는 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다. ‘중립적인 가치’란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중립이라는 가치’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가치라는 것을 꼭 ‘누구를 편든다’는 정도의 ‘편싸움’ 식으로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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